냉장고 속 바뀌면 혈관 속 달라져… 추석엔 가족력 관련 대화를

50대 초반 직장인 K씨가 내과 진료실을 찾았다. 최근 회사 건강검진에서 혈당 수치가 높게 나와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의사가 물어보니, 아버지가 50대에 당뇨병 진단을 받아 평생 약을 드셨고, 형도 40대 후반부터 당뇨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생님, 저도 결국 당뇨병에 걸리는 건 아닐까요?” K씨는 표정이 어두웠다.
그렇다. K씨는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 이른바 가족력(family history) 때문이다. 가족력은 특정 질환이 집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뜻한다. 흔히 유전병과 혼동하지만, 가족력은 유전자 문제만이 아니다.
특정 질병에 취약한 유전적 소인이 집안 내에 있는 경우도 있고, 부모와 자식이 공유하는 생활 습관, 그 집안 고유 식습관,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온 행동 궤적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질병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가족력이라고 한다.

의학적으로 가족력은 양쪽 부모 위아래 세대 직계가족, 사촌 이내 가족 구성원 중 특정 질환을 앓은 사람이 2명 이상 있는 경우를 말한다. 통상적인 질병 발생 나이보다 이른 나이에 질병이 발생한 가족이 있을 때도 그 집안에 가족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대장암은 60~70대에 잘 생기는데, 50세 전에 대장암이 발생한 가족이 있다면, 대장암 가족력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많은 의학 연구가 가족력의 위력을 보여준다. 부모 모두가 당뇨병이라면, 자녀가 당뇨병에 걸릴 확률은 일반인보다 3~4배나 높다. 심근경색증의 경우도 가족력이 있으면 발병 위험이 1.5~2배 높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이 같은 심근경색증으로 세상을 뜬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3대손 김정은 위원장은 심근경색증 가족력에 처해 있다. 심근경색증이 55세 이전에 발생한 남자 가족이 있거나, 65세 이전에 발생한 여자 가족이 있으면, 해당 가족은 심근경색증 발병 위험이 더 높아진다.
암도 가족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부모 형제자매에게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위암 등이 있으면 같은 암 발생 위험은 대략 2배 높다. 뇌졸중, 치매, 우울증, 천식 역시 가족력이 있으면 발병 가능성이 뚜렷하게 올라간다. 그러기에 의사들이 환자와의 첫 질병 상담에서 “가족 중에 같은 병을 앓은 분이 있나요?”라고 묻는다.
세월이 흐를수록 부모 얼굴을 닮아가듯, 나이 들수록 부모 질병을 따라간다. 그렇다고 가족력을 무서워할 것만은 아니다. 가족력을 파악한다면, 오히려 나에게 어떤 질병이 생길지 예측할 수 있기에 되풀이해서는 안 될 반면교사가 된다.
영화의 결정적 전말을 그 영화를 아직 안 본 사람에게 말해서 영화 볼 맛을 떨어뜨리는 사람을 ‘영화 스포일러’라고 한다. 가족력은 집안 사람들에게 미래에 생길 질병을 미리 알려주는 ‘질병 스포일러’인 셈이다. 감사하게도 죄송하게도, 내가 앓을 질병을 부모가 미리 앓았다고 보면 된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경고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족력은 피만 타고 오는 게 아니다. 냉장고로도 대물림 된다. 어릴 적부터 짭짤한 반찬과 달콤한 음료와 음식을 늘 옆에 두고 먹어왔다면, 그 습관은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 고혈압 아버지, 당뇨병 어머니, 고지혈증 자녀 집안이 될 수 있다.
가족력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다. 오히려 내 질병을 미리 알 수 있는 힌트다. 대비할 수 있는 미래 질병 지도이자, 건강 나침반이다. 암 가족력이 있으면 암 검진 나이를 앞당겨라. 가족 중에 대장암 환자가 있으면, 통상 50세부터 하던 대장내시경 검진을 40세부터 하는 게 좋다. 부모가 암에 걸린 나이보다 10년 이르게 암 검진하는 것을 권장한다.
“아버지를 닮아서 혈압이 높다”는 말 뒤에는 기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짠 국물과 식사 후 소파에 누워 TV 보는 운동 부족 습관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대사 질환이나 심혈관 질환이 가족력으로 있다면, 가족 전체가 나서서 생활 습관부터 바꾸시라. 짠 음식, 가공식품을 줄이고, 채소나 통곡물 섭취를 늘려라. 하루 30분 이상 걷기를 가훈으로 모셔라.
집 안에 체중계를 놓고, 혈압계를 비치하라. 냉장고에 단 음료, 가공육, 짠 반찬, 기름진 고기를 두지 마시라. 과일, 신선한 채소, 유제품, 계란, 두부, 순살 단백질로 냉장고를 채우시라. 냉장고 속이 바뀌면, 혈관 속도 바뀐다. 아버지가 심근경색을 겪으셨다면, 자식은 더 일찍 운동을 시작하고, 담배를 당장 끊어야 한다. 어머니가 위암으로 고생하셨다면, 자식은 40대부터 위내시경을 꾸준히 받고,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제균 치료를 받으시라.
곧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소중한 명절이다. 올 추석 밥상머리에서는 음식 이야기, 정치 이야기나 나라 걱정만 할 게 아니라, 가족 건강 얘기를 나눠보자. 아버지는 언제부터 혈압약을 드셨는지, 삼촌은 지난번 대장내시경에서 용종을 몇 개나 뗐는지, 예전에 할머니는 어떤 병으로 고생하셨는지, 할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 일찍 돌아가셨는지, 형제자매는 최근 어떤 건강검진 결과표를 받았는지 등을 들어보자. 누가 언제부터 어떤 병을 앓았는지 집안 병력을 파악해 놓으면, 예방 전략을 짜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번 추석, 가족과 함께 송편을 나누면서 가족력도 나눠보자. 건강한 집이라는 새로운 가족력이 대물림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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