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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

Recompanion 2025. 8. 22.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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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회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바로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의열단을 창설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했으며, 한국광복군 부사령관까지 역임한 그는 일제강점기 가장 활발한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공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9년 중국에서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은 1920년대 일제와 친일파들이 가장 두려워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다.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친일파 암살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은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문제는 해방 이후였다. 김원봉은 1948년 김구(1876~1949)·김규식(1881~1950)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이것이 그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남한에서는 보수세력들이 그를 '월북자'로 낙인찍으며 배척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목숨을 걸고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 그의 공로는 순식간에 묻혀버렸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에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욱 참혹한 것은 가족들이 당한 비극이었다. 1950년 7월 초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경남 밀양의 김원봉 생가에 군경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표적은 김원봉의 네 동생인 김구봉·김용봉·김봉기·김덕봉이었다.



당시 22세로 부산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막내 김구봉(1928~1950)은 아내가 임신한 상태에서 끌려갔다. 아무런 죄목도, 재판도 없었다. 단지 '월북자' 김원봉의 형제라는 이유만으로였다. 이렇게 끌려간 네 형제는 밀양 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국민보도연맹원 300여 명과 함께 집단 학살당했다.


이승만의 철저한 정치적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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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그리고 중국마저 외면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 오마이뉴스 https://share.google/gRqguC9cqsVwe9qmz

남과 북, 그리고 중국마저 외면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제80회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바로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의열단을 창설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했으며, 한국광복군 부사령관까지 역임한 그는 일제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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